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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키티버니포니

키티, 버니, 포니.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취향에 비해 조금 많이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라임이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품들은 이름만치 귀엽지는 않았다. 작은 여우가 여럿 수놓아진 쿠션이 있었는데 '귀엽다'라는 한마디 표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었다. 하양, 파랑, 검정의 스트라이프 파우치가 눈에 들어와 하나 구매했다. 친구들을 만났는데 셋이 같은 파우치를 들고 나와 웃어버렸다. 생일인 친구는 키티버니포니의 탄탄한 소풍 가방을 받고 싶어 했다. 결혼을 앞둔 친구는 온통 키티버니포니로 침실을 채울 기세였다. 정신 차려 보니 키티버니포니 가방, 테슬, 브로치 따위가 내 집 안 곳곳에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키티버니포니는 한국의 대표적인 패브릭 디자인 브랜드가 되었어요. 그래도 아직 생소해하는 분들, 제품으로만 접해온 분들에게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키티버니포니는 2008년에 시작해서 얼마 전 8주년을 맞이한 패브릭 브랜드예요. 아버지가 1994년도부터 [장미 산업사]라는 자수공장을 운영하시다가, 우리의 브랜드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셨어요. 제조업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OEM(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것. 출처:네이버 시사상식사전)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자수만 하셨고 전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던 터라, 제조에 있어서는 까막눈이었죠. 2년 동안 시행착오만 했던 것 같아요. 초기에는 생산에 제약이 많아서 쿠션 밖에 못 만들었어요. 지금은 상품군이 많이 늘었죠. 노하우도 많이 생기고.
커튼, 베딩, 쿠션, 파우치, 주방용품 등 생활에 쓰이는 패브릭 제품을 모두 국내에서 생산해요. 자수공장이 있으니 자수 제품의 비중도 꽤 되죠. 디자인, 생산, 온라인/오프라인 유통, 마케팅을 모두 직접 하고 있어서 컨트롤이 보다 수월하고, 유통마진을 뺄 수 있으니 좋은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죠.

제일 처음에 만들었던 제품이 기억나세요?
생생해요. 아홉 가지 쿠션을 만들었는데, 그중 세 가지가 동물 모양이었어요. 토끼, 사슴, 펭귄. 브랜드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초기 콘셉트는 동물이었거든요. 그땐 지금보다 귀여운 걸 많이 좋아했어요. 그다음 세 가지는 동물 그래픽을 자수로 수놓은 쿠션이었고, 나머지 셋은 현재 주력으로 하고 있는 기하학 패턴 디자인이었어요.

최근의 제품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실 거의 비슷해요. 특히 기하학 패턴은 많이 유사하죠. 그 대신에 동물이 많이 줄었어요.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저의 취향도 변했으니까요. 신기한 것은, 키티버니포니의 첫 구매자들은 꼭 동물 제품을 사요. 아무래도 20대 친구들이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소품으로는 귀여운 이미지가 잘 맞나 봐요.

그럼 키티버니포니의 방향성은 대표의 취향에 달려있나요?
제가 결정권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저의 선호도에 맞춰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 통일성이 생겨요. 새 제품이 옛 제품과 잘 어우러졌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소품을 샀다고 이미 가지고 있는 걸 버리거나 창고에 처박아놓게 된다면, 그건 쓰레기를 생산하는 행위잖아요. 브랜드가 코어를 유지하려면 결정권자가 바뀌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특별히 선호하는 시대나 지역의 디자인이 있나요?
아마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렇겠지만, 바우하우스Bauhaus의 디자인을 좋아해요. 그때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기본 도형이라든지 선명한 색감을 좋아해요. 반대로 말하면 애매하고 모호한 것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뜻이죠. 빨강, 파랑, 검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메인 컬러로 사용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적인 컬러예요. 원색 말고도 한복의 단아한 컬러감이 느껴지는 패턴들도 있고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빨갛고 파란 원들을 나열한 것뿐인데 태극기를 연상시킨다고도 하시고.

패브릭의 메리트와 제약이 있을 것 같아요.
메리트라면 유연한 소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이고, 제약이라면 역시 유연하기 때문에 힘이 없다는 점이에요. 납작한 에코백이나 커튼 같은 제품이야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조금만 형태가 달라져도 보강제가 필히 들어가야 하죠. 소파처럼 어떤 틀에 패브릭을 씌울 수는 있지만 그런 방법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더 이상 패브릭으로 만들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하지만, 혹시 놓쳤을지도 모를 쓰임새들을 찾아서 계속 개발 중이에요.

최근에 재미있는 콜라보레이션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이유에서인가요?
콜라보는 계속 해왔는데, 패브릭이라는 영역을 벗어난 건 최근이죠. 키티버니포니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서 '스튜디오 KBP'를 만들었어요. 1년 정도 밖에 안 된,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그룹이에요.

그 과정에서 새롭게 시행착오를 하고 있나요?
제작에서의 시행착오랄 건 없는데, 대중들이 생소해하는 것 같아요. 스튜디오 KBP 홈페이지에 담은 이미지나 영상들이 아트적이고 모호하긴 해요. 티슈케이스에서 연기가 나오기도 하고. 창작자들이나 매체들은 엄청 반기고 칭찬도 많이 해주시는데, 정작 소비자들이 어려워해요. 재미만을 위해 만든 게 아니라 판매가 이루어져야 계속 작업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어떻게 해야 더 직관적이고 쉽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아요.
약 3년 동안은 적자를 각오하고 있어요. 브랜드 가치를 만들기 위함이지 당장의 수입을 위한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너무 해보고 싶던 일이라 재미있어요. 역시 모르는 분야는 어렵다는 생각도 새삼 들고요.

가장 최근의 작업을 이야기해주세요.
그레이트마이너Greatminor라는 스튜디오와 워터볼 작업을 했어요. 작년에 출시한 헤비 미러Heavy Mirror를 보자마자 함께 일하고 싶었거든요. 원래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작업을 하는 스튜디오인데, 키티버니포니의 이미지에 맞게 볼드하고 컬러풀하게 방향을 잡았어요.
첫 미팅 때부터 제품이 나오기까지 반년이나 걸렸어요. 부자재 찾는 데만 두 달이 걸렸거든요. 물속에 들어가니 색감도, 질감도, 사이즈도 모두 변하는 거예요. 샘플링을 정말 많이 해보았죠. 결과는 만족스러워요. 멤피스Memphis에 한창 빠져있을 때 길종상가와 기본 도형 작업을 했는데, 그때보다 쓰임새가 더 명확해서 그런지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우리나라 디자인 수준이 많이 높아졌어요. 사업을 하면 더 느껴질 것 같아요.
2008년에 아버지가 브랜드를 만들자고 해서 조사해보니 온라인 중심으로 패브릭 제품을 판매하는 숍이 채 50개가 안 되었어요. 자체 디자인을 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죠. 그마저도 꽃무늬나 프릴 투성이었고. 사실 패브릭은 제 분야가 아니어서 불안하기도 했는데, 실정을 보고 나니 되려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다행히 시작하자마자 관심을 받고 빨리 클 수 있었어요. 그 뒤로 2년 사이에 패브릭 숍이 500개가 되었고,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아졌죠. 패션 디자이너들이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부담 없이 접근하기도 하고요. 경쟁이 심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덕분에 시장이 커지면서 수준이 높아졌어요. 우리나라의 많은 것들이 짧은 기간 동안 상향 평준화되었죠.

불이 쉽게 붙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 현상에서 잘못된 점이 분명히 있겠죠?
뭐든 시작보다 유지가 어려워요. 저도 시작은 겁 없이 할 수 있었어요. 오히려 지금이 더 힘들어요. 직원 수는 2-30배가 늘어났고, 공장도 커졌고, 사옥도 생겼는데, 이 모든 걸 유지하려면 매출이 계속 늘어나야 하죠. 어떻게 해야 새로운 고객들이 찾아오고 기존 고객은 재방문할지 고민을 많이 하는데, 그런 각오 없이 시작해버리면 금방 포기하게 쉬워요. 단기간에 사람들을 끌기 위해 단가를 대폭 낮추고, 유행에 휩쓸려 이리저리 치이다가 브랜드가 사라져버리면 소비자는 다시 방황을 시작해야 하죠. 오랫동안 사업하는 사람들도 피해를 보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디자이너나 브랜드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까요?
버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죠. 과연 오늘의 소비자가 3년 뒤에도 A/S를 받을 수 있을까, 소비자들이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해요. 역사를 가진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 디자인 능력을 키우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요.

버티는 것에 있어서 핵심은 뭘까요?
자신의 일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이건 너무 분명해요. 흥미를 잃는 순간 무너져요. 패브릭의 한계 따위에 대해 얘기했지만, 이 일이 여전히 재미있어요. 간혹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스스로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제가 이루어낸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것들을 보러 다녀요. 일부러 비싸고 좋은 걸 찾아요. 작년 휴가 때는 태국의 The Siam 리조트에 묵었는데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저보다 더 높고, 아름답고, 오래된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 가슴이 뛰어요.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도 들고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영국 소설가)는 [자기만의 방]에서 'No need to be anybody but oneself'라고 했어요. 키티버니포니의 대표가 아닌 김진진은 어떤 자신인가요?
그렇게 자신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키티버니포니를 만들어오는 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역할이 더 많아졌어요. 아이가 있기 전과 지금의 모습도 다르고요. 일단 브랜드를 정의하는 기준부터 변했죠. 이제는 나 혼자만 생각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어요. 혼자인 시간이야 만들 수 있지만 온전히 혼자인 순간은 없는 거예요. 항상 아이나 일을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아이가 조금 크면 다시 나만의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그럴 필요 없이 가족이 너무 좋아요. 가족이 있는 제가 저예요. 사장은 외롭지만 엄마는 외롭지 않아요.

엄마가 된 후에 무엇이 좋아졌나요?
시간요. 결혼 전에는 야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아이가 생기는 순간 모든 스케줄을 아이에게 맞출 수밖에 없어졌어요. 무조건 7시에는 퇴근하고, 주말에는 일을 못 해요. 일하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버린 거죠.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다 되는 거예요. 오히려 집중력도 더 높아지고 밸런스가 좋아졌어요. 그동안 참 어리석게 일했구나, 싶었죠.

키티버니포니를 하면서는 어떻게 변했나요?
전 원래 소극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었어요. 혼자 밤새어 고민하고 작업하며 막연하게 스타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이었죠. 그런데 사업을 시작하면서는 현실감이 살아나고 저에게 맞는 자리를 찾게 됐어요. 지금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편해지고,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여행을 다니는 기준도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책자에 나오는 관광지만 쫓아다녔는데, 이제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가고 싶은 곳들을 찾아다녀요. 아이가 있으니 공원이나 수영장을 가기도 하고요. 여행이 훨씬 더 재미있어졌어요.

사소한 것부터 온전한 나의 것이 되어가는군요.
관점이나 취향이 더 뚜렷해져야 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 그렇게 되는 듯해요.

미대에는 여학생들이 많은데, 사회에 나오면 남자들의 활동이 더 많아요. 학생들이 여성의 진로에 대해 궁금해하더라고요.
저의 직업에서는 여성으로써의 약점을 못 느꼈어요. 오히려 여자여서 장점인 경우가 더 많았죠. 그래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강해져야 해요. 스스로 여자라고 의식하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이제 성별에 대해서는 논할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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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라는 이름을, 친구들은 진진-이라고 불렀다. 별명으로 남았을 그 호칭을 김진진 대표는 진짜 이름으로 개명해버렸다. 독특해서인지 이름을 바꾸면서부터 인생도 좋은 기운을 품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래서 아들 이름을 짓는 것도 한참 걸렸다고 말하는 그녀는 대담하고 또 신중한 사업가이자 엄마였다.

인터뷰를 마치고는 간단한 점심을 했다. 치즈 샌드위치와 얼그레이 빙수 사이에서 키티버니포니가 아닌 다섯 살짜리 아들의 미래가 주메뉴가 되었다. 자기가 살아온 것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으로 기대와 걱정을 저울질했다. 하지만 김진진이 추구하는 삶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가족과 일이 소중하다 한들, 자신을 버려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적당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한 그녀는 7시에 퇴근을 했다.

interviewee키티버니포니 http://www.kittybunnypony.com/
interviewer 더콤마에이 thecomma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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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티버니포니

드로잉으로 가방 / Illustrator 정인하

정인하 작가의 그림은 춤을 춘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가만히 누워있는 고양이, 가만히 구워진 빵의 그림들인데도 흔들흔들 춤을 춘다. 어느 여름날, 선풍기 바람에 살랑살랑 커튼이 넘실대는 시원한 거실 바닥에 옆으로 누워 얼룩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수박을 까먹는 상상이 몸 주변으로 피어오른다.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 같다. 시간의 감각을 잃은 채 작가의 지난 그림을 모두 훑고 나니 어깨에 짊어진 짐, 화려하게 포장된 매일이 무겁게 느껴졌다. 두둥실 떠오르고 싶어졌다.




그림에 자유로움이 강한데, 일러스트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그림은 어릴 때부터 그렸지만 일로 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림과 관련된 직업으로는 화가나 만화가 정도 밖에 몰랐거든요. 그러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되고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진학해서 일을 하려는데 잘 안 맞더라고요. 디자인을 하면서도 그림을 직접 그려서 소스로 사용하곤 했는데, 그 무렵 즈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영역과 접하게 되었고 에이전시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를 시작했어요. 주로 어린이 그림책 일을 하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은 블로그나 SNS에 올리고 있어요. 그림으로 책이나 물건을 만들기도 하고요.

요즘의 그림도 그렇지만, 예전 그림들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간결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사진이나 글에서 엿보이는 작가님의 성향이나 생활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할까요.
감정이 차오르지만 짐짓 괜찮다는 듯한 의뭉스러운 느낌이 좋아요. 담담하고 모호한 것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담백한 그림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되도록 덧붙이기보다는 빼려고 하는 편이에요.

간혹 동양화의 느낌도 받아요. 여백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평소에 어떤 걸 많이 찾아다니시는지.
음악을 많이 들어요. 장르는 가리지 않지만, 처음엔 심심하다가도 갑자기 엇?! 하고 귀를 사로잡는 음악이 있거든요. 자기만의 속도와 틈을 가지고 있는 음악을 발견하면 빠져들어요. 형태는 조용하지만 감정은 조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실까요. 그런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초 신타, 아베 히로시, 이토 히데오 등의 일본 그림책 작가를 좋아해요. 그리고 마티스. 이우경의 그림도요(특히 ‘속초에서’라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주로 연필/펜을 이용한 수채화를 그리시는데, 그 사이사이에 가위로 오린 듯한 사진 콜라주도 섞여있는 느낌이 재미있어요.
연필과 물감의 조합은 강하지 않고 흔들거리는 느낌 때문에 애용해요. 이런 하늘거림에 하드한 블랙이 섞인 감도를 좋아해요. 콜라주는 가위나 종이의 물성 때문에 우연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무심하게 잘랐는데 엇나간 것이 좋아서 그대로 쓰기도 하고, 어떤 면을 잘랐는데 그 뒷면이 예상치 못하게 아름다워 그걸 쓰기도 하고요.

웃기려고 의도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잔잔한 위트가 담겨 자꾸 미소 짓게 만들어요.
어쨌든 웃는 게 좋으니 저도 모르게 자꾸 실없는 유머를 하게 돼요. 독자들이 적절한 포인트에서 웃으면 뿌듯해지기도 하고요. 진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틈새에서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림체나 컬러, 스토리에서 편안함과 친근함을 많이 받아요. 언젠가부터 대중매체에서도 '완벽하지 않음'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져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글이나 음악보다 그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조금 못 그린 듯 잘 그린 그림이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만들기를 바라고요. 독립출판도 그런 흐름과 맞닿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기존의 것을 답습하지 않고 조금 모자라더라도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요. 하지만 모자람을 의도해서는 안되고, 주체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세련된 기술이 필요하겠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님의 그림은 어떤 건가요? 작가님이 좋아하는 자신의 그림은? 그 둘이 일치하기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실제로 일할 때 자주 드는 고민이에요.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그림은 제 마음에 드는 개인작업 위주예요. 특히 이 작업들을 좋아해 주시면 기쁘고 힘이 나더라고요. 하지만 일 때문에 그리는 그림들(어린이 책, 잡지 등)은 제 취향보다는 컨셉이나 상황에 맞춰야 해서 어려울 때가 있죠. 이 둘의 간극을 좁히려고 꾸준히 노력 중이에요.

그림일기를 많이 그리시는데, 쉽지 않은 일일 것 같거든요. 작아도 멈추지 않는 성실함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그 힘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수영도 진짜 열심히..)
여행 중에 상념을 끄적이거나 드로잉을 하거나 금전 기록 중심으로 그림일기를 쓰곤 했는데, 지나고 보면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특히 금전 기록!). 그래서 2014년 봄에 제주도 여행을 떠나면서는 여행 그림일기를 쓰자고 마음먹었어요(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log.naver.com/jeykiki). 그게 여행 동기는 아니었지만, 여행을 즐겁게 해주더라고요.

아침마다 지정한 노트에 드로잉과 글을 세 페이지씩 쓰는데, 정신이 멍하고 사심도 없는 상태에서 그린 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게 많이 나왔어요.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좋은 게 슬쩍 나오더라고요. 제 그림은 공들여야 성공하는 편이 아니라서 많이 그릴수록 건질 것들이 생겨요. 성실하게 생활할 때 좋은 그림이 나오고 상태도 좋아지는 것 같아요. 스스로 멈추기 전까지는 끝이 없는 일이라 시작하기 전엔 겁나고 귀찮지만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만들어져요.

수영은 계속하고 있어요. 최근에 슬럼프라 시무룩했는데 지난주부터 갑자기 나아지고 있어요. 수영도 업 다운이 있더라고요. 이유를 알 수 없이 잘 안 풀릴 때도 마음을 내려놓고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잘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요. 그러다 또 슬럼프가 오기도 하고. 그림도 비슷한 것 같아요. 뭐든 멈추지 않을 때 얻게 되는 것이 있어요.

[두부와 그림], [수수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제 작업들을 책으로 정리해보고 싶어서 출간한 독립출판물이에요. [수수한 순간]은 물에 관련한 그림들이나 그 흐름에 맞는 그림들을 엮었고, [두부와 그림]은 그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그림일기 컨셉으로 만들었어요.

또 계획 중이신 출판물이 있나요?
앞서 말씀드린 책들을 만드는 경험은 정말 재미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쉬움도 남아요. 특히 [두부와 그림]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욕심부리진 않았나 싶거든요. 다음엔 좀 더 정리되고 정제된 책을 만들고 싶어요. 그림책도 생각하고 있고요. 아름답고 좋은 책을 많이 만들고 싶어요.

서울에 거주하시다가 외곽으로 이사하셨죠. 북적거림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건 어떤가요? 작품에 영향을 많이 줄 것 같아요.
서울이 아니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어요. 다만 결혼 전후로 일상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내적으로 적응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특히 결혼식을 올리면서 수많은 소비들에 치이다 보니 정신적으로 지치더라고요. 가만히 앉아 책을 읽거나 차분하게 곱씹으며 작업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젠 일 년쯤 지나 제 시간을 가지면서 예전의 리듬을 되찾고 있어요.

그림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포인트는 아마 소소함이 아닐까 해요. 베이킹이라던지 자수도 자주 하시던데, 혼자놀기 또한 소소함에서 시작되는 거겠죠.
딱히 소소하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런 느낌을 갖고 있나 봐요. 맛있고 귀여운 간식을 마음에 드는 접시에 담아놓고 앉아있는 모습을 떠올려요. 흐흐. 빵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그릇도 좋아해서 자주 그리고요. 자수나 위빙은 작업의 테두리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걸 만들고 싶은, 단순한 마음에서 시작해요. 특히 자수는 실로 만드는 드로잉이라 계속 하고 싶어요.

카프카가 이런 말을 했었죠. "우리에게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작가님을 보며 어쩌면 이걸 가장 잘 실천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었어요.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저도 항상 헤매고, 다시 잘 굴러가다가도 또 헤매기 일쑤니까요. 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시간을 보낼 때 작업도 잘되고, 작업이 잘 되면 머리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 들어요. 다른 이의 글이나 마음에 더 수용적이 되고요. 일단은 자신의 일에 있어서 마음이 안정되어야 다른 소소한 것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고양이를 엄청 좋아하는데, 그러고 보면 혼자 작업하는 작가들은 고양이를 참 좋아해요.
저도 제가 고양이를 기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우연한 기회에 데려온 아기 고양이가 이젠 너무 애틋한 중년 고양이가 되어버렸네요. 다옹이를 데려오기 전에는 고양이에 무심했기 때문에 다옹이 어릴 적 사진이 몇 장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진이 어마어마하게 쌓였어요. 그렇게 되더라고요. 계절이 바뀌고 시간별로 달라지는 고양이의 하루가 저의 하루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행복해요. 매일 보는데도 더 귀여워지기만 하네요, 신기하게.

원모어백과 콜라보 천가방을 제작하신다고요. 어떤 가방인가요?
원모어백에서 고양이와 봄을 그린 그림으로 가방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주셨어요.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봄기운에 폴짝 뛰어오른 느낌의 고양이와 손글씨를 조합한 스케치가 나왔는데 마음에 들어 여러 장 그려봤어요. 그중 두 장의 그림이 가방으로 나오게 됐어요.

interviewee정인하 http://blog.naver.com/jeykiki
interviewerTHE, A 더콤마에이 thecomma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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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으로 가방

interview / 모어댄레스

커플이 함께 운영하는 브랜드는 무수히 많다. 상품을 넘어서 편집샵이나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 연인이 짝을 지어 동업하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중 굳이 한 커플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은 꽤 괴로운 일이었다. 모두 각자의 고충과 사랑을 담고 있을 것이므로. 그러다 [큐앤드이반느]라는 블로그에 발이 걸렸다. '큐'라는 남자와 '이반느'라는 여자가 마치 [냉정과 열정 사이]의 시점처럼 각자 폴더를 나누어 운영하고 있었다. Work 폴더의 [모어댄레스]와 [STEEKISH]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니 호주, 아시아, 유럽, 중동 등의 세계여행 폴더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커플 사냥은 방황을 멈추었고, 시린 햇빛이 내리고 뽀얀 입김이 서리는 겨울날, 연남동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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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규 (이하 큐)
김효빈 - 이반느 (이하 빈)


모어댄레스More than less라는 이름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명언 "Less is more."에서 착안했겠죠? 매장이나 제품들을 보면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것 같은데, 모어댄레스라는 이름은 오히려 그 반대의 뜻이 아닌가요?
큐 - 모어댄레스는 '적은 것보다 더 적게'라는 뜻인데 오해의 소지가 있는 작명이죠. 하지만 저희는 그만큼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고 있어요. 전 건축을, 효빈은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둘 다 좋아하는 사조예요.

연남동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사실 연남동이 이렇게 핫한 동네인 줄 몰랐어요. 홍대보다는 덜 아기자기한 느낌이고, 동진시장도 있고, 마침 저희가 찾는 공간이 적당한 가격으로 나와서 계약하게 됐죠. STEEKISH라는 가죽 가방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편집숍에 입점했는데, 디자인이 워낙 미니멀하다 보니 제품이 설 자리가 없더라고요. 같은 고충을 겪고 있는 브랜드가 많을 것 같아서 직접 숍을 오픈하게 되었어요.

여행 중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하셨어요. 결국 왜 STEEKISH였나요?
빈 - 원래 가방을 하고 싶어서 산업디자인을 택했어요. 아무리 공부하고 여행하고 생각해봐도 가방이더라고요.

그런데 패션디자인이 아닌 산업디자인을?
빈 - 가방을 하고 싶었지만, 한 우물만 파는 건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선택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그러면 돌아올 길이 있어야 하거든요. 산디과에서 가방을 깊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배우면서 기본기를 닦고 경험의 폭도 넓히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보니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건 가방이라는 걸 더 잘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STEEKISH의 디자인이 패션 측면에서의 가방보다는 제품의 인상을 풍기는 것 같아요.

특히 사각형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빈 - 학생 때부터 유기적인 스케치를 잘 못했어요. 박스는 참 잘 그렸는데. 그땐 제가 유연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하고 중성적이어서, 언뜻 보면 누구나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은 패션과 감각에 민감한 사람들이 선호할 것 같아요. 막상 들면 보기보다 튈 것 같아요.
첫 번째 라인을 다소 대중적으로 풀어서 두 번째 라인은 저희 취향을 고집했더니, 역시나 좀 어려워해요. 예상했던 반응이고요. 앞으로 저희 스타일과 대중성의 밸런스를 잘 맞춰가고 싶어요.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 뭔가요?
기능이에요. 물건을 담는 것이 모든 가방의 기능이지만, 그 부분을 어떻게 더 새롭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요. 스타일링만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매번 정말 어려워요.

겉보기에 단순할수록 더 많은 고민이 담겨 있죠. 어떤 사람들이 사용하길 바라는 건가요?
저희가 고민한 부분을 이해하는 분들이요. 사실 가방은 예쁘기 때문에 구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예뻐서 샀더라도, 사용하면서 저희가 담은 기능의 매력을 느끼셨으면 해요.

STEEKISH는 가죽 가방 브랜드죠. 천가방을 제작하는 이유는? 제작자의 시선에서 가죽 가방과 천가방의 차이는 뭐가 있을까요?
STEEKISH는 분명 가죽을 주로 사용하는 브랜드예요. 하지만 가격이 높은 소재의 특성상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없게 되고, 소비자는 브랜드 경험에 한계가 생기게 되죠.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천가방을 제작해 봤는데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저희 브랜드를 알릴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가 되었죠. 제작자로서 느끼는 가죽과 천의 차이는 소재 고유의 관리법 정도예요. 개인의 브랜드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점에서는 그저 같은 ‘가방’이겠죠.

4월에 새로운 STEEKISH 천가방을 출시할 계획이라고요. 어떤 점이 가장 많이 바뀌었나요?
기존 상품은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한 천가방이었어요. 튼튼한 면 소재, 적당한 사이즈, 그리고 가운데에 새겨진 로고. 베이직한 가방을 만들었으니 이제는 조금 더 아이덴티티가 묻어나는 디자인을 해보려 해요. 차분하고 미니멀하지만, 약간의 기능적 위트를 더해 STEEKISH만의 감성을 표현하고 싶어요. 아직 내부적으로는 두 가지 시안을 놓고 싸우고 있지만, 새로운 로고를 장착했다는 점과 누가 봐도 STEEKISH 가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끔 만들 거라는 점에서는 동일해요.

원모어백과 모어댄레스, 뚜렷한 취향을 갖고 운영되는 편집샵이라는 점에서 관통하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아요. 원모어백과 관련된 소식이 있다면?
모어댄레스에서는 주기적으로 전시를 하고 있어요. 4월 5일부터 사진전을 시작하는데, 포토그래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천가방을 함께 디자인하고 있어요. 원모어백을 통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전시에 대해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두 달 주기로 한 명의 작가, 또는 브랜드와 미니멀리즘이라는 큰 주제 아래 전시를 해요. 질 좋고 뛰어난 디자인을 하고 있음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가 많을 것 같아서 기획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아요. 전시했던 브랜드의 매출도 많이 오르고요. 이미 있던 제품들을 소개하는 것뿐인데 말이에요. 홍보 채널을 제공하고, 전시효과를 보고 나면 뿌듯하죠.

전시하는 브랜드와 제품들이 미니멀리즘과 어떻게 연결되죠?
문승지 디자이너의 전시는 [Less waste, more simple]라는 제목 하에 진행됐어요. 합판 한 장에서 자투리 없이 네 개의 의자가 나오도록 디자인된 제품을 소개했어요. 에떼 스튜디오의 전시는 [Rawness, it's function]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날 것'이었어요. 화학 처리되지 않은 구리로 화분을 만드는데, 이 덕분에 세균 증식이 억제되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거라고 해요. 그리고 그레이코드의 전시 제목은 [Everything starts with a dot]이었어요. 가장 미니멀한 소리를 최소한으로 사용해서 음악을 만드시거든요. 점이라는 요소를 이용해 콜라보한 제품을 생산해서 판매도 하고 있어요.

이 곳에서 사람들이 얻어갔으면 하는 게 있다면?
영감. 저희의 확고한 메시지를 전시와 제품들을 통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분들은 이 작은 곳에서 몇 바퀴를 돌며 한참 머물다 가시는 반면에, 쓱 둘러보고 금방 나가는 분들이 있어요. 저희의 세계관과 잘 맞는 고객층이 더 두텁게 생겨서, 일부러 찾아오고 싶어 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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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댄레스와 STEEKISH는 단순하고 확실한 이유로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미니멀한 가방에 최적인 미니멀한 매장, 네모난 공간에 최적인 네모난 가방으로 엮여있다. 마치 큐와 이반느처럼. 하나보단 둘, 둘보다는 셋이라고 했던가. 둘은 합쳐서 하나가 되고, 둘은 모여서 셋 같은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intervieweeMORE THAN LESS 모어댄레스 www.morethanless-seoul.com / www.steekish.com
interviewerTHE, A 더콤마에이 thecomma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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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LESS's bag

문장으로 가방 / 시인 이제니

돌과 돌은 멀다. 달과 달은 멀다. 물과 물은 멀다. 말과 말은 멀다. 말과 물은 멀다, 물과 돌은 멀다. 돌과 달은 멀다. 달과 말은 멀다. 달과 달이라는 말은 멀다. 돌과 돌이라는 말은 멀다. 물과 물이라는 말은 멀다. 말과 말이라는 말은 멀다.

멀어지는 사이 다시 떠오르는 말
달아나는 사이 다시 사라지는 달

<달과 돌> 중에서.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돌과 달과 물과 말이 뒤엉켰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꽃과 재가 있었고, 기린과 구름이, 나무와 앵두가 있었다. 내가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이것들은 무엇을 뜻할까 생각을 되짚어 보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입가에 맴도는 말의 소리와 리듬이었다. 눈앞에 줄지은 글을 읽는 목소리를 복잡한 두뇌가 따라잡지 못했다. 내 삶은 이 시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설익어서일까, 하는 의문점과 함께 책을 마쳤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단어들로 이런 혼란을 야기하는 작가는 어떤 생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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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직접 만나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합니다. 시인이 되는 것은 어땠나요?
오래도록 소설 습작을 해왔었는데 시로 등단을 하게 됐어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투고를 했으니까 등단하기까지 15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습작기간이 오래되다 보니 등단 직전에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였어요. 이번이 마지막이다 라는 심정으로 그동안 모아둔 시를 투고를 했는데 그 시편들이 당선이 된 거지요.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터졌네요. 기분이 이상했을 것 같아요.
계속 써나가라는 응원처럼 느껴져서 감사했지만 한편으론 그토록 오래 소설을 써왔는데 어째서 시로 등단을 하게 됐을까 스스로 의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시로 등단을 했다고 해서 글쓰기가 달라진 것은 아니에요. 습작 시절에도 시가 소설 같고 소설이 시 같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언젠가는 소설로도 독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 소설가가 되려고 했나요?
시와 소설은 각각 고유한 장르적 특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에게는 기질적으로 소설쓰기가 더 맞다고 느꼈어요. 작가가 되어야겠다 라고 결심하기 이전부터 소설을 쓰고 있었으니까요. 머리로써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 간 것이지요. 그렇다고 시를 쓰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초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학교 문예부 활동을 했었는데, 시도 쓰고 산문도 쓰고, 그야말로 문학소녀라고 할 만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좋아하는 시편들을 필사도 많이 했었는데요,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백일장에 나가 쓰는 정도 외에는 시인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시인이라는 존재는 뭐랄까, 일종의 채널링이라고 할까, 어떤 신의 영역에 가까운, 하늘의 말을 받아 적는, 그렇게 타고난 기질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럼 시인님은 시를 어떻게 쓰시나요?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쓰려고 합니다. 벼락처럼 영감이 찾아와서 한달음에 써내려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영감에 의지해서 쓰는 것도 한순간이거든요. 영감이라는 것도 몸과 마음을 오랫동안 예열하는 시간이 있어야지만, 그러니까 무언가 말하려는 그것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아야지만, 어느 순간, 문득,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거든요. 어떤 목소리 혹은 사물과 세계의 본래의 모습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작년(2014) 겨울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읽어보았습니다. 바람, 구름, 나무 등의 자연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거제도의 영향이 큰 것인가요?
어떤 구체적인 풍광이나 자연물, 혹은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무엇으로 시를 시작하지 않는 편이에요. ‘나무’나 ‘구름’, ‘바람’ 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들여다본다기 보다는 ‘나무’, ‘구름’, ‘바람’ 과 같이 어떤 사물들의 이름을 통해,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들을 통해 그 사물의 내부로 들어간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거제도에 오래 살고 있는데도 시편에서 그런 자연의 이미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했어요.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더라도 제가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란 것은 글쓰기에 당연히 묻어날 수밖에 없는 거겠죠. 초등학교 시절, 창문을 열면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살았어요. 집에서 어른 걸음으로 서너 걸음만 걸으면 바다로 바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바다가 가까이에 있었어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물결이 오고 가고, 배가 오고 가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또 태풍이 몰아닥쳐서 파도가 사납게 일기도 하고, 그러다 또 어느 결에 잔잔해지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밀려오는 물결과 물결과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무한에 대한 감각이랄까, 무한의 무게와 똑같은 소멸의 이미지라고 할까, 그런 감각이 저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거겠죠.

글에 나오는 바다가 꼭 바다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군요. 하지만 나무와 앵무, 구름과 기린이 나오면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시각화를 하게 되는데, 말씀하신 대로라면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님의 작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시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정서를 그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나 정서를 드러내고 가리키는 언어의 흔적, 그 언어가 사라지는, 그렇게 무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를 매순간순간을 따라 가보려는, 그것을, 그 순간을 드러내보려는 시도 그 자체가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제 글쓰기에 있어서는 언어가 특별한 위치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가 언어를 불러오고,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면서, 이렇다 할 중심이 없이 모호하게 확산되는 듯 하지만 어떤 일관된 리듬 속에서 어렴풋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어떤 감정의 결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어렴풋하게 수렴되는 어떤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의 의미에 붙들리기 보다는 일단 그런 리듬을 따라가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 읽기를 어려워하시는 분들은 대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듯이 정확한 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답을 찾으려고, 단 하나의 의미를 해석해내려고 애를 쓰다 보니, 시 읽기가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형적인 독법에서 벗어나서 몸과 마음을 좀 가볍게 하고, 시 한 편 한 편에 집중하기 보다는 일단은 시집 전체를 훑는다는 생각으로 읽다 보면 시인들 고유의 리듬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의미를 더해 봐도 좋을 것 같구요. 제 시편들에서도 ‘구름과 기린’, 혹은 ‘꽃과 재’와 같은 낱말과 낱말 간의 상관관계를 논리적으로 따지려하기 보다는, 단어들이 반복되고 중첩되고 충돌하는 그 리듬만을 따라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머리보다는 감각으로 읽는 것 같아요.
시집을 묶을 때마다 시편들의 배치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첫 번째 시집도 그렇고, 두 번째 시집도 뒷 페이지로 갈수록 점점 더 리듬이 고조되는 듯한 느낌으로 시를 배치했어요. 어떤 심장 박동을 따라가듯이, 조금은 가벼운 시편들을 시작으로 점점 말이 속도를 높여 달리듯 급박한 호흡으로 흘러가는 구조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편들을 묶었어요.

그래서인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읽으니 훨씬 좋게 다가오더라고요. 나중에는 모든 문장들이 연결되어서, 저도 모르게 랩 하듯이 리듬을 타고 있었어요.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의도하신 대로 읽었다니 뿌듯하네요. 학교에서 배우던 시는 참 엄숙했어요. 그래서 항상 어려운 문학이라고 느꼈는데, 혹시 대중성을 고려하신 건 아닌가요?
대중성이라는 것만큼 모호하고 예측하기 힘든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독자를 의식하거나 특별한 의도 혹은 전략을 가지고 써내려가진 않습니다. 시라는 것이 그렇게 전략을 가지고 씌어지는 것도, 전략적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어떤 언어적 상황에 처한 사람이 그렇게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시를 쓸 때 파괴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지만,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라면, 저는 어떤 상투성이라고 할까요, 안이하고 쉽게 씌어지는 문장들, 시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의 말을 늘어놓으려는 태도를 경계하려고 합니다. 제가 써내려가는 시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는데요. 그저 시라는 그 무엇으로, 그것 그대로, 아무런 설명 없이, 아름답고 온전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시, 그런 글은 왜 안 좋은 건가요?
좋은 시편들은 짧은 한 줄의 문장으로도 삶의 비의를 드러내 보여주고 어떤 깨달음을 주지요. 저 역시도 그런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구요. 하지만, 시는 그런 식의 잠언 그 자체가 아니거든요.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으면서 지시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시인님에게 특별한 작품이 있나요?
언제나 오늘 쓴 시가 가장 좋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써내려간 시편들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지 않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돌아가서 읽게 되는 시가 있어요. <페루>라는 제 등단작인데요. 시를 쓴다, 혹은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의식 없이 써내려간 시편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에너지로 한달음에 씌어진 시이기도 하구요. 문득문득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고 느껴질 때면 <페루>를 다시 읽어보곤 해요.

영화 [인셉션]에 나오는 토템과도 같은 존재군요. 자신을 잃어버릴 때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것.
누구나 춥고 어두운 시절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 당시에는 춥고 힘든 기억이지만, 또 돌이켜보면 그런 시련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고유한 빛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일평생 살아가면서 그 타고난 빛을 마음껏 거침없이 발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 고유의 에너지라고 할까, 잃어서는 안 되는 날 것 그대로의 본성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을 잘 간직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러려면 가끔씩 계기라는 게 필요하지 않나요? 계속 거제도의 집에서 생활하시면 변화는 어떻게 만드는지.
일상이라는 것이 남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도 같은데요. 대부분 읽고 쓰고 듣고 보는 일들로 채워지고 있구요. 될 수 있으면 단순하고 규칙적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대학을 마치고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진정 글쓰기에만 집중해보자고 다시 거제도로 돌아온 것이 서른한 살 무렵이었어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의 일상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 외에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가는 정도이구요. 소소하게 국내 여행도 다니고, 몇 년에 한 번씩은 외국으로도 가구요. 2009년인가는 휴스턴의 NASA에도 견학을 갔던 기억이 있네요. 몇 년 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싶어서 시베리아로 날아갔던 적도 있구요. 그 여행에서 좀 큰 사고를 겪었는데, 그 이후로는 아직 멀리 가질 않았는데, 이제 건강도 좋아졌으니 다시 어딘가로 가고 싶어지네요.

굉장한 경험들을 찾아다니시네요. 새로운 계획은 없나요?
2010년부터 ‘더플 플레이 포엠’이라는 낭독회를 만들어서 진행을 하고 있어요. 몇 년간은 글쓰기도 바빴고 또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낭독회를 쉬고 있는 상황인데, 내년부터는 낭독회도 다시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쌍둥이 언니랑 오래전에 계약해둔 산문집 원고가 있는데, 내년에는 그 산문집 원고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원모어백에서 시인님의 천가방을 만든다고요. 가방에 들어가는 구절은 무엇인가요?

'열리고 열리는 여리고 어린 삶 / 빗나가고 빗나가는 빛나는 삶'.

삶이란 것이 늘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저런 실패와 실수 속에서, 좌절도 하고 절망도 하면서, 그런 날들 속에서 상처도 받고, 그렇게 아픈 자리가 아물면서 단단하게 굳은살도 박히면서. 그렇게 삶은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상처라는 것은 아물었다 해도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흔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그 자리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삶은 매순간 반짝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면 가장 어두웠던 순간이 가장 환한 순간이었구나 새삼 느끼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게 삶은 여리고 어린 나를 향해 끝없이 무한히 열리고 열리고 있는 거거든요. 새로운 문이 열리고, 새로운 열매가 열리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앞머리만 무성하고 뒷머리에는 머리카락 한 올 없다. 그를 발견한 자가 머리채를 쉽게 잡기 위함이며, 한 번 지나가버리면 다시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한순간에 무엇이 되는 사람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시인이 되어버린 사람의 삶 속에는 언제나 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일수록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어쨌거나 이제니 시인은 9년 전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잡았고, 앞으로도 여지껏처럼 글을 쓸 터였다.

시인을 만났던 날의 공기는 유리처럼 맑고 푸를 정도로 투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았던 망원동 카페의 2층 자리에는 오후 내내 강렬한 햇살이 비추었다. 부서질 것만 같은 여린 날 중에도 곳곳에 뜨거움이 흔적을 남겼다. 너무 뜨거워서, 그것이 지나간 자리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interviewee시인 이제니
interviewerTHE, A 더콤마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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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가방

interview / 밴드 코가손

반 년 정도 클래식 기타를 배워본 적이 있다. 통기타보다 줄이 부드러워 손은 덜 아팠고, 연주를 하는 행위도 퍽 재미있게 느껴졌지만, 도통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피아노처럼 한 음, 한 음을 쳐야 하는 클래식 기타의 곡은 몇 마디 외우기도 벅찼다. 이때부터였을까, 나에게 음악은 동경의 대상이자 좌절의 벽이 되었다.
'합주실이 좀 누추해요'라는 메시지를 받고 신촌으로 향했다. 저녁의 습기가 섞인 축축한 담배향을 맡으며 지하로 들어서니 꽤 근사한 창작의 현장이 펼쳐졌다.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는 악기와 마이크 스탠드 등이, 쉬지 않고 소리 내는 그들의 일상을 대신 티내주었다. 인디밴드 역시 나에겐 막연한 미지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독립'이라는 영역에서 우리는 수많은 생각과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표현하는 언어가 다를 뿐, 감정의 냄새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연인의 것과 같이 닮아있었다.

멤버 소개
김원준(이하 김) - 보컬, 기타
이경환(이하 이) - 베이스
권우석(이하 권) -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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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소개를 부탁해요.
저희는 기타 팝 밴드 [코가손]이라고 합니다.

기타 팝은 어떤 장르인가요?
락밴드는 기타 리프 같은 연주가 중심이 되는 게 일반적이에요. 그에 비해 저희 음악은 멜로디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팝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도 기타가 메인이라 기타 팝이라고 불러요. 굳이 말하자면 그런 거고, 이젠 장르의 벽이 많이 허물어져서 정확히 분류하는 것 자체가 좀 애매해요.

[코가손]이라는 이름은 동요 가사에서 나온 거죠? 무슨 뜻인가요?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친구와 술 한잔 하다가 [코끼리 손]이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보다는 [코가손]이 나을 것 같더라고요. 다음 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봐도 마음에 들어서 결정했어요.

각자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다가 결성된 걸로 아는데.
김 - 가장 최근에 활동했던 밴드는 [서교그룹사운드]였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포니]에서도 활동했어요.
이 - [얄개들]에서 기타를 쳤었고, 지금은 [푸르내]에서 기타를 치고 있어요. 우석이가 제안해서 [코가손]에서는 베이스를 맡고 있죠.
권 - 베이스와 드럼은 구하기 어려워서 '금드럼', '은베이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예요. 냉면 먹으러 가는 길에 베이스 자리를 제안했는데 냉큼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 - 기타만 치다가 베이스도 해보니 새롭고 재미있어요. 원래는 기타를 하고 싶었는데, [코가손] 음악에는 원준이 기타가 더 잘 어울려요.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김 - [이소라의 프러포즈]를 보면서 세션맨이 되고 싶다고 했었는데, 엄마가 기억하시고 통기타랑 교본을 생일 선물로 주셔서 고등학교 때 처음 치게 됐어요. 지금은 별로 안 좋아하세요(웃음). 회사에 다니다가 제 시간을 갖고 싶어서 그만 둔 상태거든요.
권 - 중2 때 관심이 생겨서 교회에서 치곤 했어요. 할아버지가 새 할머니 꼬실 때 정자에서 북을 치셨다고 해요. 큰아버지도 사물놀이패에 계시고. 타악기 유전자가 있나 봐요. 엄마는 제가 뭐라도 하고 싶다고 하면 굉장히 좋아하세요. 배구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 반대로 포기하셨거든요.
이 - 전 친구가 기타 학원에 가자고 해서 끌려갔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설탕물]이라는 스쿨밴드(얄개들의 전신)를 했는데, 공연하면서 관심을 받기 시작하니까 재미가 붙더라고요.

실제로 학교 축제 때 관심받는 게 좋아서 악기를 시작하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그 인기에 끌려서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코가손]은 언제 데뷔했나요?
첫 공연은 작년 4월에 했어요. 2년도 안 됐네요. 첫 EP 앨범 발매는 올해 3월에 했고요.

2년 동안 어땠나요?
권 - 생각보다 잘 풀렸어요. 즐겁게 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 해봐요. 그 전에는 조급함에 치이고, 멤버들간의 연대가 그리 끈끈하지도 못했거든요.

밴드는 연대감이 정말 중요할 것 같아요.
제일 중요하죠. 음악적으로 잘 맞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 멤버들끼리 잘 맞아야 돼요. 밴드 하기 전에 알던 사람도 막상 작업하면서 부딪히는 일이 많거든요.

슬럼프를 극복하는 밴드의 요령이란 게 있을까요?
밴드들이 해체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항상 힘들지만 서로 의지하고 인내하는 건데, 하나가 무너지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요. 슬럼프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것 같아요. 성장은 계단식으로 하잖아요. 한 번 벽을 뛰어넘었다가도 오랫동안 인내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뭐든 나아지는 것 같아요.

소개해주고 싶은 곡이 있나요?
김 - 요즘 라이브 할 때 [좋은 하루]라는 곡이 신나더라고요. 다른 곡들보다 직설적인 사우드를 갖고 있고, 펑크 느낌도 살짝 나거든요. 앞으로 저희가 나아갈 방향의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권 - 최근에 네 곡이 나왔는데 다 마음에 들어요. 아직 가사를 써야 해서 발표는 안 했지만, 저희의 느낌이 잘 나는 곡들인 것 같아요. 셋이 인간적으로도 잘 맞지만, 합주를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곡들이 많이 나오곤 해요. 이 곡들은 내년 초에 발매할 정규 앨범에 실릴 예정이에요.

[코가손]의 아이덴티티는 뭔가요? 경쾌하고 친근한 음악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심오하거나 철학적인 것보다는 내추럴한 걸 좋아해요. 그리고 치열하게 기술을 보여주기보다는, 다소 러프하고 루즈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덴티티를 정의하자니 참 어렵네요. 아직은 저희 색깔을 찾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팬층은?
주로 어린 친구들이에요. 대학생들.

인디씬이 보다 대중화된 것 같아요.
피부로 와 닿을 정도는 아니에요. 10년 전보다야 대중화됐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어쩌면 그때의 홍대가 더 활발하고 다양했다고 볼 수 있죠.

버스킹 문화는 활발해 보이던데요.
저희는 버스킹을 좋아하지 않아요. 인지도를 노리고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음악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유명한 팝송을 부르는 정도예요. 인디 음악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길가다 잠시 귀가 즐거울 수는 있겠지만, 밴드 입장에서는 재미없어요.

밴드는 이래야 한다,라는 주관적인 기준이 있다면?
창작자로서 음악적 고민을 하는 건 당연하겠죠? 그런데 요즘 들어 해외 밴드를 베끼는 밴드들이 보여요. 오마주가 아니라 코스프레 수준이에요. 저희도 좋아하는 음악을 많이 들으니까 합주를 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음악이 나올 때가 있는데, 거기에서 선택을 해야 돼요. 우리의 것으로 재창조하느냐, 혹은 버리느냐. 그런데 어차피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그냥 쓰겠다는 밴드들이 있어요. 이건 인디팬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밴드가 잘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미 검증된 음악을 하는 거니까.
아직 [코가손]이 개성만점이라고 자부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색깔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어요. 이건 끝없는 노력이 될 거예요. 유행과 상관없이 꾸준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꼭 기회가 오더라고요. 어차피 트렌드라는 건 너무 빨리 지나가고,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때가 오는 것 같아요.

인디문화는 자연스럽게 접하기보다는 관심을 가져야 알 수 있는 문화인데,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저희는 선택적으로 인디밴드가 된 것이지만, 요즘 비주류가 주류로 넘어가는 과정이 음악 프로그램이 아닌 예능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긴 해요. 오디션 프로그램도 많지만, 저흰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거지 경연을 하고 싶진 않아요. 외국에서는 인디밴드가 라이브 토크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미디어에 노출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고 다양해요. 일상에 고루 퍼져있는 문화고, 대중들도 더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죠.
유통구조도 엉망이에요. 얼마 전에 대기업에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만들었는데, 광고에 '넌 아직도 돈 내고 음악 듣니?'라는 카피를 쓴 거예요. 음악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누군가가 땀 흘려 만든 콘텐츠를 무료로 소비하는 것에 너무 익숙한 사회죠.

최근에 기사를 하나 봤어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가 많아진 인디밴드가 있는데, 한 달 동안 7천 건이 넘는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수를 기록했는데 만원도 못 벌었다는 거예요.
분명한 문제이지만, 시장의 흐름을 당장 바꾸기는 어려워요. 아티스트들이 먹고살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최근 들어서는 대중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나 [굿-즈] 같은 행사를 보면, 창작물을 소유하기 위해 지갑을 여는 행위가 자연스러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LP를 모으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고요. 일본 같은 경우에는 밴드도 굿즈를 만드는데, 공연이 끝난 후에 그걸 사려고 줄을 엄청나게 서더라고요.

그래서 [코가손] 천가방을 만드신 건가요?
수익보다는 홍보를 위해 만든 거예요. 처음에는 저희가 만들었는데, 원모어백에서 제작하면서 퀄리티가 좋아졌어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수량이 될 것 같아요.

밴드에 로고가 있는 게 일반적인가요?
외국에는 많이 있어요. 요즘에는 우리나라에도 간간이 보이고요. 저희 로고는 [오디너리 피플]이라는 디자이너 친구들이 EP 앨범 디자인을 하면서 만들어준 거예요. 로고의 선들이 삐뚤빼뚤하고 제대로 맞닿는 부분이 없는데, 디자이너들에게는 이런 시안이 굉장히 괴로운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래서 멋있는 거라고. 아, 이 로고가 저희 밴드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요즘 들어 사람들이 완벽하지 않은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완벽하지 않은 것도 완벽주의의 산물이죠.

연말 계획은?
12월 26일에, 합정동 [1969]에서 단독 공연을 해요. 올 한 해를 정리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저희를 좋아해주신 팬들에게 보답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어요. 유니클로 감사제 같은 거 있잖아요. 코가손 감사제.

어, 그거 괜찮은데요.
어, 코가손 감사제. 그걸로 해야겠어요.

다음 달, [클럽 빵]에서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매된다. 총 세 장의 시디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첫 번째 시디의 첫 번째 트랙으로 [코가손]의 곡이 실렸다며 기쁨과 고마움이 뒤섞인 자랑을 했다. 묵묵히 가는 길을 밝혀주는 작은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다. 마지막 수량까지 판매하면 더 이상 에코백을 만들 것 같지는 않다는 말에, 사랑받는 인디밴드로써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지상으로 나오니 어둑어둑해진 저녁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뭘 하지? 잠시 고민을 하다 홍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친구를 만나 뜨끈한 우동을 먹는 중에, 연말에 뭐 할 거냐 묻길래 대답했다. 합정동에서 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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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조현정 쥬얼리 디자이너

그녀는 머리 색깔이 특이하다. 언젠가는 붉은 핑크빛이었다가, 온통 파스텔톤 무지개색으로 뒤덮였었는데, 이번에는 은발에 가까운 금발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 다 밀어버렸던 눈썹이 거의 다 자라났다고 다행스러워하는 말에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다. 다소 멍하다가도 놀라운 기억력과 지식을 뿜어내는, 아이인지 어른인지, 공예가인지 디자이너인지 좀처럼 정의 내려지지 않는 사람. 무지개색 날개를 단 나비처럼 자유분방한 그녀가 성숙해져 가는 중에 잠시 붙잡고 대화를 나눴다.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스톡홀름에서 J0o0lry라는 개인 주얼리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숫자 0과 영문 o를 써서 얼굴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보이나요? 글자로 읽히지 않고, 얼굴처럼 인식되는 이름을 짓고 싶었어요. 대학에서는 산업디자인 전공을 했는데, 금속공예 공방을 다니다가 스웨덴으로 유학 왔어요.

전공은 왜 바꾸게 된 건가요?
스톡홀름에서 J0o0lry라는 개인 주얼리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숫자 0과 영문 o를 써서 얼굴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보이나요? 글자로 읽히지 않고, 얼굴처럼 인식되는 이름을 짓고 싶었어요. 대학에서는 산업디자인 전공을 했는데, 금속공예 공방을 다니다가 스웨덴으로 유학 왔어요.

그냥 산업디자인이 잘 안 맞았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렇게 학고를 맞고, 휴학을 했어요. 전공에 대한 미련이 없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저 앞날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어요. 휴학 중에 어쩌다 사주를 봤는데, 금속이나 보석 관련된 일을 하면 좋다는 거예요. 웃기지만 그 말이 금속공예를 고려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심지어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니까 장래희망란에 보석 디자이너라고 써놨더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쓴 것 같았는데.

스웨덴으로 오는 과정은 어땠어요?
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참 단순했어요. 한국 학교에 넣었다 수차례 떨어지고, 외국으로 눈을 돌리던 중에 미국의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와 스웨덴의 Konstfack(콘스트팍)에 지원했어요. 콘스트팍은 굉장히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곳이었고, 학비도 무료였고, 유럽에서 영어로 공부할 수 있었고. RISD는 워낙 유명한 학교니까, 정말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제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거고요. 어차피 학비가 너무 비싸서 갈 수 없는 곳이었거든요.

콘스트팍에 합격하셨나 봐요.
아뇨, RISD에 붙었어요. 부분 장학금까지 준다고. 그러고 나니 콘스트팍을 떨어진 이유가 궁금한 거예요. 학교에 메일을 보냈더니, 교수님이 피드백을 듣고 싶으면 찾아와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들고 스웨덴까지 왔어요. 우리는 실험적인 작업을 지향하는데, 방향이 좀 다른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나름 한국에서 실험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노는 물이 달라요. 성향이 다른 거예요. 우리나라는 기법을 중심으로 장인정신이 강조되고, 만드는 사람(smith)으로써의 소명의식에 대한 탐구를 많이 하는 편이라면 콘스트팍에서 장인적 기술은 기본적인 수단일 뿐이고, 그걸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을 많이 하는 거죠. 그리고 이듬해에 다시 지원해서 결국 합격했어요.

그렇게 입학한 학교는 어떻던가요?
나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주는 곳이에요. 자율적으로 작업하도록 두기 때문에,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손해거든요. 자신의 작업 프로세스와 리듬을 알아가게 돼요.

산업디자인과 다른 점을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생각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요.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산업디자인처럼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실험을 해요. 아니면 아닌 거고, 괜찮으면 생각해봐요. '왜 괜찮은 거지?' '연결점이 뭐지?'. 생각의 위치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에요.

논리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모든 과정에 자신만의 이유가 있는 거군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논리라고 하면 될까요.
네, 질감이나 무게 등을 손끝으로 직업 느끼면서 작업해야 하거든요. 그 느낌을 계속 다듬으면서 감각을 단련하는 거예요. 머리와 손이 이어지는 부분을.

스웨덴에 남고 싶다는 생각으로 유학 왔나요?
작정한 건 아닌데, 2학년 때는 그렇게 마음먹었죠. 사실 어디에서 일하든 한국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왜 한국을 떠나 있고 싶은 건가요?
싫다고 표현하긴 그렇고, 아무래도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그 사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잖아요. 뉴스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그런 정보에 항상 접근해있는 게 지쳤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외국에서는 약간 방관적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나요? 예전에 파올로 코엘료의 [11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남미 여자가 스위스로 떠나요. 바다 건너 외국에 가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 가지 않으면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거라고, 그게 싫다는 식의 내용이었는데. 그게 참 마음에 오래 남아있었어요.

오랜만에 한국에 가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곳이잖아요. 익숙한 과일가게 냄새나 공기의 습도, 길가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난간을 보면, 마치 한국에서 계속 살았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시간이 흐르는 템포가 다르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전 한국에서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학교 다닐 때도 스스로 경쟁을 거부했고. 경쟁하다 보면 제 능력을 백분 발휘할 수가 없어져요. 좀 느긋하게 멀리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스톡홀름에서는 뭔가에 쫓겨서 살기보다 오롯이 자신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아무래도 이방인이라서 그렇기도 해요. 사회에서 절 열외로 보니까. 일종의 자유이자 핸디캡이죠.

그러다 보면 동기부여가 덜 되기도 하지 않나요? 끊임없이 스스로 일어서야 하니까.
그렇죠. 안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졸업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마치 십대로 돌아간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니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가장 힘든 건 역시 비자 문제예요. 연장 기간에는 스트레스를 받죠. 수입으로 증명해 보여야 하니까. 사실 지금으로써는 괜찮지만 쉰 살이 돼서도 이렇다면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려면 대중을, 상업주얼리를 무시할 수가 없고, 이 '0,1,7,8,9' 시리즈가 현실적 결심의 첫 프로젝트인 거예요.

상업주얼리를 경험해본 소감은? 현실과 타협한 거잖아요.
시작은 그렇죠. 비자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 시점에서 상업주얼리에 발담그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겪어보니 오히려 아트 주얼리에 대한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몸에 제대로 착장 하지도 못하는 걸 장신구라고 할 수 있나.
이건 공장처럼 같은 걸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 힘들어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로 시작하느라 황동으로 작업했는데, 샘플 작업만 해도 수두룩하니까 정말 죽겠더라고요. 앞으로는 은이나 금 같은 소재를 써서 객단가 높은 커스텀 주얼리를 하고 싶어요. 어쨌든 사업이니까.

스웨덴에 살면서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인가요?
콕 집어서 언제,라고 하긴 어렵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워요. 잔잔한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음식이 별로라고들 하는데 전 음식도 잘 맞아요.

사무치게 외로울 때가 있을 것 같아요. 겨울이 참 긴 나라인데.
가장 행복했던 때도 1학년 때였고, 가장 외로울 때도 그 때였어요. 금요일 밤이었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예요. 우리 반 친구들이 학교에서는 참 잘 지내는데 밖에서는 교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한국인 언니랑 자주 만나곤 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당시에 모토로라 휴대폰을 썼는데, 언니가 시금치 파이를 먹으러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제가 그걸 몇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확인한 거죠. 지금도 그 문자가 참 마음에 걸려요. 얼마나 외로웠을까.
또 한 번은, 우리 기차 타고 코펜하겐 갈까?하는 말에 벌떡 일어나 기차역에 갔는데, 좌석표가 매진인 거예요. 그럼 공항 스타벅스나 가자,하고 공항까지 갔는데, 스타벅스는 게이트 안에 있더군요. 그날따라 휑하던 공항 소파에서 둘이 편의점 커피 한잔씩 하고 집에 왔던 일도 있었어요.

이방인으로써 인간관계에 대한 갈증은 없나요?
기본적으로 넓은 인간관계에 대한 욕심이 없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마다 단짝 친구가 한 명씩 있었고, 학교, 회사 등에도 각각 친한 친구가 하나씩 있어요. 물론 이런 성향 덕분에 여기에서 잘 살아남는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괜찮아요. 외로움도 즐기게 되는 것 같아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에 익숙해지는 거죠. 많은 것들이 자연스러워지고. 어떤 고충이 있을 때 힘들게 바꾸려고 하기보다 익숙해지도록 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는가 봐요. 지금의 모습이 편해 보이는데, 더 바라는 게 있을까요?
내 집을 갖고 싶어요. 스웨덴은 하숙이 보편적이어서, 학생 시절부터 셋방살이한지가 벌써 6년이 돼요. 작년까지만 해도 나만의 공간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데, 정말 사소한 욕구에서부터 시작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로 붕어를 키우게 됐는데, 더 큰 어항을 사주고 싶고, 어항 주변에 화분으로 숲을 만들어주는 게 꿈이거든요. 그러려면 좀 더 넓은 제 집이 필요하겠죠.
사는 게 마냥 편하고 만족스럽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거예요. 콘스트팍 자기소개서에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얘기를 썼었어요. 알을 깨려면 먼저 익숙한 환경이 파괴돼야 해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파괴해야 변할 수 있다는 그녀의 책상은 달라졌다. 3년 전 책상 위를 가득 채우던 조개껍질, 구두조각, 팝콘과 사과 같은 재료는 온데간데없고, 서로 엮이기를 기다리는 물결 형태의 은조각들이 둥글게 모여있었다. 현실과 손잡은 현장에서, 그녀도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현재의 모습에 덤덤히 만족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처럼. 마침 작업실에는 스톡홀름의 강한 여름 햇살이 비추고, 작업 책상 위의 금속 파편들은 움직이는 빛을 따라 반짝였다.

interviewee조현정 쥬얼리 디자이너 j0o0l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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